"어이, 정윤호 뭐 보냐?"

"? , 왔냐?"

"뭘 그렇게 보기에 사람이 왔는데도 알지를 못해?"

 

윤호는 카페에 앉아 친구를 기다리며 창가에 앉아있는 한 남자를 보고 넋을 놓고 있었다. 친구가 와서 윤호를 부를 때까지 윤호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친구는 윤호가 아까 보고 있던 곳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한 남자가 오른손으로는 턱을 괴고 왼손으로는 빨대를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야?"

"아니."

"근데 왜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그냥. 뭐 마실래?"

 

윤호가 화제를 돌렸다. 친구는 늘 마시던 거, 하고 이야기했다. 윤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로 향하면서 시선이 저절로 창가의 남자에게 향했다. 주문하려는 손님이 많아 계속 남자를 쳐다보았다.

 

"저기, 앞에 줄 줄어들었는데요."

 

윤호의 뒤에 있던 여자가 조심스럽게 윤호에게 이야기했다. , 죄송합니다. 윤호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아메리카노 하나, 바닐라 라떼 하나 주세요."

 

윤호는 주문을 마친 뒤 진동벨을 갖고 자리로 돌아왔다. 남자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오늘 날씨 완전 좋지 않냐? 봄이다, ."

"내일은 다시 추워진다더라."

"그건 그거고. 오늘 같은 날 데이트하면 딱인데. 왜 너나 나나 솔로냐. 이 얼굴에 애인이 없다는 건 좀 너무하지 않냐?"

 

친구의 말에 윤호는 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친구가 투덜대며 윤호가 보고 있었던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 남자도 솔론가보다. 이런 날씨에 혼자 저기서 있는 거보면."

"저 사람이 솔로든 커플이든 네가 왜 걱정이야."

"네가 하도 쳐다보고 있으니까 신경이 쓰이잖냐. 근데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뭔가 있는 것 같지 않냐? 네가 쳐다보고 있었던 게 이해가 되기도 하고."

 

윤호의 시선도 남자에게로 향했다. 남자는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갑자기 살풋 미소를 지었다. 창가를 비추는 햇살에 남자의 얼굴이 반짝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손에 들고 있던 진동벨이 울리는 게 느껴졌지만 윤호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야야, 정윤호. 진동 오는 것 같은데?"

"? , 그러네. 갔다올게."

", 너 뭔가 불안해서 안되겠다. 내가 갔다올게. 뭐 시켰냐?"

"아메리카노랑 바닐라라떼."

"오케이. 갔다오마. 정신 좀 차리고 있어."

 

친구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윤호를 뒤로 한채 픽업 장소로 향했다. 친구가 갔다 돌아왔을 땐 윤호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정윤호, 정신 차렸네."

"내가 뭐 어쨌다고."

"왜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았냐?"

"별로 그렇진 않은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확실히 아까보다 저기압인데."

 

친구가 트레이를 내려놓고 윤호에게 바닐라 라떼를 건넸다. 윤호는 바닐라 라떼를 받아들고 뚜껑을 열어 후 하고 불고는 한모금 마셨다. 하아- 윤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왠 한숨? 나 갔다온 사이에 뭔 일 있었냐? 왜 이래."

"별 일 없었어."

", 수상한데."

 

친구가 엄지와 검지로 턱을 매만지며 윤호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확실히 아까 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친구는 윤호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남자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앞에 친구인 듯 보이는 남자가 앉아있었다. 아니, 친구라기엔 뭔가 분위기가.

 

", , 뭔가 느낌이 좀 그렇다? 설마 남자 애인?"

 

창밖을 보고만 있던 남자가 마주보고 앉는 남자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친구에게 보이는 웃음이라기엔 너무나도 환한 웃음이었다. 친구가 시선을 거두고 윤호를 보았다. 윤호는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아니, ? 왜 저런 표정이야. 오호라. 친구는 눈치가 빨랐다. 설마, 하며 윤호를 쳐다보았다.

 

", 정윤호. 너 설마 저 남자 좋아하기라도 한 거야? 무슨 아이돌 노래처럼 첫눈에 반했다는 뭐 그런 거?"

"조용히 말해. 주위에 다 들려."

 

윤호의 성적취향을 아는 친구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윤호에게 다다다 쏘아붙였다. 윤호는 혹시나 주변에 들렸을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둘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네 입장에선 첫눈에 반한 남자가 애인이 있다니 심기가 불편하긴 하겠는데. 이야, 남자애인이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친구는 남자의 표정을 계속 살폈다. 환하게 웃고 있던 얼굴이 점점 무표정으로 변해갔다. 뭔 일 있나? 윤호도 그 모습을 보고 다시 관심을 보였다. 대화가 들리지 않으니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반대편에 있던 남자가 열심히 뭐라 이야기했다. 무표정으로 쳐다보던 남자의 표정이 또 변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을 부릅떴다.

 

"싸우나보다."

 

순간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드르륵하고 큰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카페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집중했다. 윤호의 눈에 일어선 남자의 얼굴이 너무나 잘 보였다. 울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고 눈을 부릅떴지만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남자가 손을 들어 손등으로 턱을 닦았다. 그리고는 왼손 약지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내어 남자의 얼굴로 집어던졌다. 남자의 왼쪽 뺨을 스치고 반지가 날아갔다. 앉아있는 남자는 가만히 있었다. 서있는 남자의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없었다. 남자의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주변에서 숨죽이며 둘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남자는 눈가에 흐른 눈물을 다 닦아내고는 숨을 잠시 고르더니 앉아있는 남자를 잡아끌고는 카페 입구로 향했다.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거두어졌다.

 

", 뭔 일 나는 거 아니냐?"

 

이 상황에서 걱정하고 있는 건 윤호와 그의 친구뿐이었다. 윤호는 어느새 식은 바닐라 라떼를 단숨에 들이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이 카페를 나서자 윤호도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따라 나갔다. 정윤호! 뒤에서 친구가 크게 불렀다. 하지만 윤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윤호가 따라오는 것도 모른채 두 사람은 건물과 건물 사이로 사라졌다. 윤호는 자리에 멈추어 건물 뒤에 숨어 둘의 대화가 들릴까 귀를 기울였다.

 

"헤어지자는 거 거짓말이지?"

"아니, 진심이야."

 

안쪽으로 많이 들어가진 않았는지 두 사람의 목소리가 확실히 들려왔다.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헤어지자는 게 진심이냐며 두세 번 물었다. 상대방의 대답은 똑같았다. 담담하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난 안 헤어져. 못 헤어져. 나 사랑한다며. 사랑한다 했잖아!"

"아니, 사랑한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 지금 뭐라고."

"나는 너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었다고. 내가 미쳤다고 남자를 사랑하냐?"

"그럼 그동안 너랑 나랑 한 건 뭐였어? 너 나 갖고 논 거니?"

"너랑 함께 있으면 기분이 이상했어.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홀렸다고. 그래서 호기심이 들었지. 너는 어떤 녀석일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궁금했을 뿐이야. 사랑해서 너랑 마치 애인 사이처럼 뭘 하고 다닌 게 아니라. 네가 나에게 관심이 있었던 거 알고 일부러 접근했어. 사귀고 아니, 사귀는 척하면서 한 달까지는 괜찮았지. 근데 계속 같이 지내보니까 확실히 알겠더라고. 정말 단순한 호기심이었구나. 분명 나같은 놈 또 있을 걸? 넌 정말 이상한 기분 들게 하는 게 있거든. 내 친구들이 그러더라. 너랑 계속 있었으면 자기들도 나처럼 됐을 거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난 남자를 사랑하지 않아."

 

남자가 말하는 동안 계속해서 끅끅, 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을 참아내던 남자가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곧 길게 말을 늘어놓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홀가분한 듯 미소를 띠며 윤호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윤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이라도 다가가서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오늘 처음 본 남자지만 꼭 오래 지켜봤던 친구가 다른 사람에 의해 놀아난 것 같은 생각에 기분이 더러웠다. 윤호는 골목으로 몸을 돌려 그 곳에 서있던 남자를 보았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있던 남자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해 흐느끼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흐윽, 나쁜 새끼."

 

무릎을 세우고 앉은 남자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남자가 고개를 들고 눈물을 손등으로 벅벅 닦아내고 일어섰다. 그래도 눈물이 계속 나오는지 계속 훌쩍이며 남자는 골목을 나가려 몸을 돌렸다가 그 곳에 서있는 윤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언제부터 거기에."

 

남자가 물었지만 윤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윤호를 쳐다보며 골목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윤호와 시선을 마주쳤다. 붉은 눈가가 윤호의 눈에 들어왔다. 물기 젖은 두 눈동자가 반짝이며 윤호를 보고 있었다. 윤호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말 못 하세요?"

"아닙니다."

 

남자의 물음에 윤호가 곧바로 대답했다. 남자는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윤호를 경계했다.

 

"저 아세요?"

"아니요. 카페에서 처음 봤습니다."

"카페. 다 보고 있었나보네요."

"애인분 아니, 그 나쁜 새끼가 오기 전부터 그쪽 보고 있었어요."

", 그러시, ?"

"쭉 지켜보고 있었어요.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계시더라구요. 초면에 이런 말 하면 실례인 줄 압니다만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 남자처럼 그냥 단순한 호기심에 그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첫눈에 반했습니다. 아직은 이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알고 싶어졌어요, 당신이란 사람. 고백을 할 상황이 아니란 건 알지만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지금 당장 받아줄 거란 생각은 안해요. 헤어진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으니까."

 

윤호는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으며 남자에게 한발짝 다가섰다. 남자는 물러나지 않았다. 남자의 두 눈이 윤호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붉게 물든 눈가가 윤호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윤호가 손을 뻗어 남자의 눈가를 매만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윤호는 남자의 눈가를 매만지다가 젖은 뺨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남자가 눈을 감았다. 남자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윤호가 급하게 손을 떼어냈다.

 

", 미안해요."

"괜찮아요. 계속해도. 이제 다 괜찮으니까."

 

남자가 언제 울었냐는 듯 밝은 미소를 지었다. . 윤호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많은 사람을 사귀어 봤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 이제 어쩌지. 윤호는 고민 끝에 남자의 손을 잡아 골목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벽에 기대선 남자와 마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아직도 모르네요. 저는 정윤호에요."

"저는 심창민이에요."

 

자신을 심창민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또 한 번 웃었다. 윤호도 덩달아 웃었다.

 

"나머진 천천히 알아가요, 우리."

 

창민이 말했다. 자신이 말하려했던 걸 먼저 이야기하는 창민에 잠시 놀란 윤호였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윤호의 두 손이 창민의 뺨을 감싸고 눈을 마주했다. 살짝 어두운 곳에서도 창민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눈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바라보다 홀린 듯이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윤호의 입술이 창민의 입술에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정작 뽀뽀를 한 윤호는 당황했고 창민은 웃었다. 창민의 웃음소리에 윤호도 웃음이 터졌다. 윤호에게 봄이 한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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