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집 근처 빵집에서 빵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러던 중, 윤호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순간 목이 메어 가슴을 탕탕치며 먹고 있던 빵을 겨우 삼키고 전화를 받았다.

"크흠, 여보세요."
- 지금 뭐하고 있어?
"어, 어, 게임하고 있었어."
-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아, 아니."
- 그럼, 다행인데. 설마 또 빵 먹고 있었던 건 아니지?
"아니, 안 먹어!"
- 깜짝이야. 안 먹으면 안 먹는 거지,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내, 내가 뭘."

헐, 뭐야. 어디 CCTV 달려서 보고 있는 거 아니야? 뜨끔해서 주변을 두리번 둘러보았다. 와, 무서워. 형은 내가 빵만 먹고 있으면 뭐라고 하곤 했던 터라 그게 듣기 싫어 형 앞에서는 절대 빵을 먹지 않았었다. 또 그럴까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러버렸다. 형은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흐음, 하고 소리를 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 거지?

- 형, 지금 네 집으로 가고 있어.
"어?"
- 거의 다 와가는데.
"뭐? 왜? 갑자기 왜?"
- 애인이 애인 집에 가는 게 뭐?
"아니,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 왜? 가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어? 혹시 집 아니야?
"아니, 집이야."
- 그럼 간다.

형은 간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어버렸다. 잠시 멍해졌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 식탁에 놓인 빵을 부랴부랴 봉투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어쩌지. 어디다 숨기지? 우왕좌왕 하던 나는 봉투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 옷장 속에 쑤셔넣었다. 혹시나 입에 묻었을까 싶어 거울을 보았지만 다행히 묻지는 않았다. 옷을 털고 부랴부랴 청소기를 돌리고 식탁도 행주로 급하게 닦았다. 완전 초스피드로 끝내고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와 동시에 딩동, 하고 벨이 울렸다. 숨을 헐떡이던 나는 재빨리 숨을 골랐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하자.

"후!"

소파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자 형이 안으로 들어왔다. 형이 신발을 벗음과 동시에 부스럭하고 소리가 났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고 순간 놀랐다. 아까 내가 먹고 있었던 빵의 빵집 봉투였다.

"그거 뭐야?"
"이거? 오다가 네 생각이 나서 들렸다가 시식 한 번 해보라고 빵 한 조각을 먹었는데 맛있더라. 그래서 이것저것 사왔지. 먹어보니 우리 창민이가 좋아할만 해."
"아, 아하하."

나는 정말 어색하게 웃었다. 평소라면 빵만 먹으면 그렇게 빵이 좋냐, 그럼 그 빵집 주인이랑 사귀어라, 어쩌고 저쩌고 하던 형이 왠일로 빵을 사왔나 싶어 조금 당황스러웠다. 순간, 옷장에 숨겨놓은 빵이 생각나 절로 시선이 방으로 향했다.

"방에 뭐 있어?"
"어? 뭐가?"
"그냥 방을 보고 있으니까 궁금해서."
"어, 뭐, 그냥 본 거야."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형이 들고 있던 봉투를 가져가 열어보았다. 어? 이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빵이잖아? 봉투 안에는 내가 평소에 자주 먹던 빵들이 하나씩 들어있었다. 빵을 하나씩 꺼내보는데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빵도 있었다.

"어? 그건 내 거."

형은 내 손에 있던 빵을 낚아채갔다. 언제는 빵 먹는다고 뭐라 했으면서 뭔 일이래?

"형, 빵 별로 안 좋아하잖아."
"아까 말했잖아. 오다가 네 생각이 나서 빵 사러갔는데 시식해보라고 준 빵이 맛있어서 이것저것 사온 거라고. 우리 창민이가 좋아하는 빵이라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있나."
"언제는 빵 먹는다고 빵집 주인이랑 사귀라면서 뭐라 하더니?"
"그 때는 네가 하도 빵만 먹고 형이랑 이야기도 안 하고 그러니까 그랬지. 빵 먹어보니까 알겠더라고.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맛있어."

형이 웃으며 다시 봉투를 가져가 식탁 위에 올려 빵을 하나씩 꺼내 올려놓았다. 아까 잠깐 봐도 내가 좋아하는 빵이 가득 들어있었던 것 같은데 확실히 많았다. 이거 언제 다 먹지? 옷장에 있는 빵은 어쩌고?

"근데 뭘 이렇게 많이 사왔어. 다 먹지도 못하겠네."
"지난 번에 보니까 다 먹던데 뭘."
"내가? 언제?"
"언제긴 늘이지."
"내가 언제 늘 빵을 다 먹었다고."

그렇게 말해놓고 보니 실제로 빵을 많이 사와도 하루만에 다 먹었던 기억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맞네, 그렇네. 형은 나를 너무 잘 알아. 식탁에 늘어놓은 빵을 보니 옷장에 있는 빵이 또 다시 떠올랐다. 이걸 말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왜 할 말 있어?"
"저기, 그게 사실은."
"뭔데? 말해."
"아까 형이 전화했을 때 사실 게임이 아니라 빵 먹고 있었어. 근데 형이 뭐라고 할까봐 거짓말했어. 미안. 근데 진짜 형이 나 빵만 먹으면 뭐라 그러니까. 그래서."
"됐어. 내가 잘못했지, 뭐. 다시는 빵 먹는다고 뭐라고 하지 않을게. 그래서, 빵은 다 먹었어?"
"아니, 더 먹으면 뭐라 할까봐 다 못 먹었어."
"빵은 어디있는데?"

형의 물음에 방을 가리켰다. 형은 방으로 들어가더니 빵 없는데? 하고 소리쳤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어 봉투를 꺼내었다. 형은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너무 뭐라 했나보다. 미안."
"아니야, 괜찮아."

나는 괜찮다 말하며 다시 방을 나와 식탁에 봉투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형과 눈이 마주치자 둘이 동시에 웃음이 터저버렸다.

"아무래도 오늘 다 못 먹을 것 같지?"
"그러게."
"우선 네가 사온 빵부터 해결하자. 형도 같이 먹어줄게."
"응."

나는 아까 미처 다 먹지 못한 빵을 꺼내어 먹으며 윤호형을 보았다. 형도 빵 하나를 꺼내어 먹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우리는 빵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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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정윤호 뭐 보냐?"

"? , 왔냐?"

"뭘 그렇게 보기에 사람이 왔는데도 알지를 못해?"

 

윤호는 카페에 앉아 친구를 기다리며 창가에 앉아있는 한 남자를 보고 넋을 놓고 있었다. 친구가 와서 윤호를 부를 때까지 윤호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친구는 윤호가 아까 보고 있던 곳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한 남자가 오른손으로는 턱을 괴고 왼손으로는 빨대를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야?"

"아니."

"근데 왜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그냥. 뭐 마실래?"

 

윤호가 화제를 돌렸다. 친구는 늘 마시던 거, 하고 이야기했다. 윤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로 향하면서 시선이 저절로 창가의 남자에게 향했다. 주문하려는 손님이 많아 계속 남자를 쳐다보았다.

 

"저기, 앞에 줄 줄어들었는데요."

 

윤호의 뒤에 있던 여자가 조심스럽게 윤호에게 이야기했다. , 죄송합니다. 윤호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아메리카노 하나, 바닐라 라떼 하나 주세요."

 

윤호는 주문을 마친 뒤 진동벨을 갖고 자리로 돌아왔다. 남자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오늘 날씨 완전 좋지 않냐? 봄이다, ."

"내일은 다시 추워진다더라."

"그건 그거고. 오늘 같은 날 데이트하면 딱인데. 왜 너나 나나 솔로냐. 이 얼굴에 애인이 없다는 건 좀 너무하지 않냐?"

 

친구의 말에 윤호는 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친구가 투덜대며 윤호가 보고 있었던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 남자도 솔론가보다. 이런 날씨에 혼자 저기서 있는 거보면."

"저 사람이 솔로든 커플이든 네가 왜 걱정이야."

"네가 하도 쳐다보고 있으니까 신경이 쓰이잖냐. 근데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뭔가 있는 것 같지 않냐? 네가 쳐다보고 있었던 게 이해가 되기도 하고."

 

윤호의 시선도 남자에게로 향했다. 남자는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갑자기 살풋 미소를 지었다. 창가를 비추는 햇살에 남자의 얼굴이 반짝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손에 들고 있던 진동벨이 울리는 게 느껴졌지만 윤호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야야, 정윤호. 진동 오는 것 같은데?"

"? , 그러네. 갔다올게."

", 너 뭔가 불안해서 안되겠다. 내가 갔다올게. 뭐 시켰냐?"

"아메리카노랑 바닐라라떼."

"오케이. 갔다오마. 정신 좀 차리고 있어."

 

친구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윤호를 뒤로 한채 픽업 장소로 향했다. 친구가 갔다 돌아왔을 땐 윤호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정윤호, 정신 차렸네."

"내가 뭐 어쨌다고."

"왜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았냐?"

"별로 그렇진 않은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확실히 아까보다 저기압인데."

 

친구가 트레이를 내려놓고 윤호에게 바닐라 라떼를 건넸다. 윤호는 바닐라 라떼를 받아들고 뚜껑을 열어 후 하고 불고는 한모금 마셨다. 하아- 윤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왠 한숨? 나 갔다온 사이에 뭔 일 있었냐? 왜 이래."

"별 일 없었어."

", 수상한데."

 

친구가 엄지와 검지로 턱을 매만지며 윤호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확실히 아까 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친구는 윤호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남자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앞에 친구인 듯 보이는 남자가 앉아있었다. 아니, 친구라기엔 뭔가 분위기가.

 

", , 뭔가 느낌이 좀 그렇다? 설마 남자 애인?"

 

창밖을 보고만 있던 남자가 마주보고 앉는 남자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친구에게 보이는 웃음이라기엔 너무나도 환한 웃음이었다. 친구가 시선을 거두고 윤호를 보았다. 윤호는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아니, ? 왜 저런 표정이야. 오호라. 친구는 눈치가 빨랐다. 설마, 하며 윤호를 쳐다보았다.

 

", 정윤호. 너 설마 저 남자 좋아하기라도 한 거야? 무슨 아이돌 노래처럼 첫눈에 반했다는 뭐 그런 거?"

"조용히 말해. 주위에 다 들려."

 

윤호의 성적취향을 아는 친구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윤호에게 다다다 쏘아붙였다. 윤호는 혹시나 주변에 들렸을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둘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네 입장에선 첫눈에 반한 남자가 애인이 있다니 심기가 불편하긴 하겠는데. 이야, 남자애인이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친구는 남자의 표정을 계속 살폈다. 환하게 웃고 있던 얼굴이 점점 무표정으로 변해갔다. 뭔 일 있나? 윤호도 그 모습을 보고 다시 관심을 보였다. 대화가 들리지 않으니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반대편에 있던 남자가 열심히 뭐라 이야기했다. 무표정으로 쳐다보던 남자의 표정이 또 변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을 부릅떴다.

 

"싸우나보다."

 

순간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드르륵하고 큰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카페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집중했다. 윤호의 눈에 일어선 남자의 얼굴이 너무나 잘 보였다. 울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고 눈을 부릅떴지만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남자가 손을 들어 손등으로 턱을 닦았다. 그리고는 왼손 약지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내어 남자의 얼굴로 집어던졌다. 남자의 왼쪽 뺨을 스치고 반지가 날아갔다. 앉아있는 남자는 가만히 있었다. 서있는 남자의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없었다. 남자의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주변에서 숨죽이며 둘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남자는 눈가에 흐른 눈물을 다 닦아내고는 숨을 잠시 고르더니 앉아있는 남자를 잡아끌고는 카페 입구로 향했다.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거두어졌다.

 

", 뭔 일 나는 거 아니냐?"

 

이 상황에서 걱정하고 있는 건 윤호와 그의 친구뿐이었다. 윤호는 어느새 식은 바닐라 라떼를 단숨에 들이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이 카페를 나서자 윤호도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따라 나갔다. 정윤호! 뒤에서 친구가 크게 불렀다. 하지만 윤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윤호가 따라오는 것도 모른채 두 사람은 건물과 건물 사이로 사라졌다. 윤호는 자리에 멈추어 건물 뒤에 숨어 둘의 대화가 들릴까 귀를 기울였다.

 

"헤어지자는 거 거짓말이지?"

"아니, 진심이야."

 

안쪽으로 많이 들어가진 않았는지 두 사람의 목소리가 확실히 들려왔다.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헤어지자는 게 진심이냐며 두세 번 물었다. 상대방의 대답은 똑같았다. 담담하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난 안 헤어져. 못 헤어져. 나 사랑한다며. 사랑한다 했잖아!"

"아니, 사랑한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 지금 뭐라고."

"나는 너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었다고. 내가 미쳤다고 남자를 사랑하냐?"

"그럼 그동안 너랑 나랑 한 건 뭐였어? 너 나 갖고 논 거니?"

"너랑 함께 있으면 기분이 이상했어.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홀렸다고. 그래서 호기심이 들었지. 너는 어떤 녀석일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궁금했을 뿐이야. 사랑해서 너랑 마치 애인 사이처럼 뭘 하고 다닌 게 아니라. 네가 나에게 관심이 있었던 거 알고 일부러 접근했어. 사귀고 아니, 사귀는 척하면서 한 달까지는 괜찮았지. 근데 계속 같이 지내보니까 확실히 알겠더라고. 정말 단순한 호기심이었구나. 분명 나같은 놈 또 있을 걸? 넌 정말 이상한 기분 들게 하는 게 있거든. 내 친구들이 그러더라. 너랑 계속 있었으면 자기들도 나처럼 됐을 거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난 남자를 사랑하지 않아."

 

남자가 말하는 동안 계속해서 끅끅, 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을 참아내던 남자가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곧 길게 말을 늘어놓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홀가분한 듯 미소를 띠며 윤호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윤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이라도 다가가서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오늘 처음 본 남자지만 꼭 오래 지켜봤던 친구가 다른 사람에 의해 놀아난 것 같은 생각에 기분이 더러웠다. 윤호는 골목으로 몸을 돌려 그 곳에 서있던 남자를 보았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있던 남자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해 흐느끼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흐윽, 나쁜 새끼."

 

무릎을 세우고 앉은 남자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남자가 고개를 들고 눈물을 손등으로 벅벅 닦아내고 일어섰다. 그래도 눈물이 계속 나오는지 계속 훌쩍이며 남자는 골목을 나가려 몸을 돌렸다가 그 곳에 서있는 윤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언제부터 거기에."

 

남자가 물었지만 윤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윤호를 쳐다보며 골목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윤호와 시선을 마주쳤다. 붉은 눈가가 윤호의 눈에 들어왔다. 물기 젖은 두 눈동자가 반짝이며 윤호를 보고 있었다. 윤호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말 못 하세요?"

"아닙니다."

 

남자의 물음에 윤호가 곧바로 대답했다. 남자는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윤호를 경계했다.

 

"저 아세요?"

"아니요. 카페에서 처음 봤습니다."

"카페. 다 보고 있었나보네요."

"애인분 아니, 그 나쁜 새끼가 오기 전부터 그쪽 보고 있었어요."

", 그러시, ?"

"쭉 지켜보고 있었어요.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계시더라구요. 초면에 이런 말 하면 실례인 줄 압니다만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 남자처럼 그냥 단순한 호기심에 그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첫눈에 반했습니다. 아직은 이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알고 싶어졌어요, 당신이란 사람. 고백을 할 상황이 아니란 건 알지만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지금 당장 받아줄 거란 생각은 안해요. 헤어진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으니까."

 

윤호는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으며 남자에게 한발짝 다가섰다. 남자는 물러나지 않았다. 남자의 두 눈이 윤호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붉게 물든 눈가가 윤호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윤호가 손을 뻗어 남자의 눈가를 매만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윤호는 남자의 눈가를 매만지다가 젖은 뺨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남자가 눈을 감았다. 남자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윤호가 급하게 손을 떼어냈다.

 

", 미안해요."

"괜찮아요. 계속해도. 이제 다 괜찮으니까."

 

남자가 언제 울었냐는 듯 밝은 미소를 지었다. . 윤호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많은 사람을 사귀어 봤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 이제 어쩌지. 윤호는 고민 끝에 남자의 손을 잡아 골목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벽에 기대선 남자와 마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아직도 모르네요. 저는 정윤호에요."

"저는 심창민이에요."

 

자신을 심창민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또 한 번 웃었다. 윤호도 덩달아 웃었다.

 

"나머진 천천히 알아가요, 우리."

 

창민이 말했다. 자신이 말하려했던 걸 먼저 이야기하는 창민에 잠시 놀란 윤호였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윤호의 두 손이 창민의 뺨을 감싸고 눈을 마주했다. 살짝 어두운 곳에서도 창민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눈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바라보다 홀린 듯이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윤호의 입술이 창민의 입술에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정작 뽀뽀를 한 윤호는 당황했고 창민은 웃었다. 창민의 웃음소리에 윤호도 웃음이 터졌다. 윤호에게 봄이 한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 나 내일 졸업식인데 올 수 있어요?”

못 갈 것 같은데.”

.”

 

창민은 졸업식을 앞두고 윤호가 혼자 살고 있는 오피스텔에서 윤호를 기다렸다. 퇴근을 하고 돌아온 윤호가 집에 들어왔다가 창민을 보고 놀랐다. 창민은 그런 윤호의 손을 잡아끌고 거실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내일 졸업식이라며 윤호에게 올 수 있냐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못 갈 것 같다, 였다. 창민은 곧바로 울상을 지었다.

 

졸업식은 못 가도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겠다.”

저녁은 친구들하고 먹기로 했어요.”

,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아니면 이번 주말에 만날까?”

주말에는 가족이랑.”

 

윤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파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창민은 소파에 가만히 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윤호가 바쁘다는 것쯤은 창민도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다. 올 수 있을 리가 없지.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네. 창민은 소파에 두었던 가방을 메고 일어났다. 도어락 열리는 소리에 윤호가 급히 나왔지만 이미 창민이 가고 난 뒤였다. 윤호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창민의 폰이 울린 곳은 거실이었다. 윤호는 내일 출근하며 폰을 가져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끊었다.

 

 

 

 

 

 

 

 

 

 

와씨, 벌써 졸업이라니 시간 진짜 빠르지 않냐? 이제 걱정이다 걱정. 우리 엄마 등록금 대출 받으면 그거 나보고 알바해서 다 갚으래. 오늘 졸업하면 알바부터 구하러 다녀야된다. , 심창민. 너는 어떻게 해주신대?”

나는 일단 대학 다니는 1년 동안은 부모님이 해주신대.”

, 복 받은 자식.”

 

친구가 장난스럽게 헤드록을 걸었다. 창민은 그런 친구의 장난에 아프다고 하면서도 함박웃음을 지었다.

 

, 근데 너 왜 아침에 전화를 안 받아?”

폰 잃어버렸어.”

어디서?”

몰라.”

그럼 졸업 선물은 폰으로 퉁 치겠네. 불쌍한 것.”

 

친구는 흑흑, 하고 소리를 내며 우는 척을 했다. 창민은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대강당으로 향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졸업식이 시작할 때가 다가오자 졸업생들의 가족들이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해 대강당이 더욱 더 웅성거렸다. 창민은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저 멀리 부모님이 보였다. 창민은 웃으며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보았다. 부모님도 창민을 보았는지 창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창민은 부모님과 손 인사를 한 뒤 또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구 찾아? 부모님?”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두리번거리는 창민을 보고 친구가 물었지만 창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창민은 윤호를 찾고 있었다. 어제 못 온다고 했지만 왔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윤호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에휴- 뭘 기대한 거냐, 심창민.”

?”

 

친구가 창민을 보았다. 창민은 혼잣말 한 거라며 신경 쓰지 말라했다. 졸업식이 시작되고 마무리가 될 때까지 창민은 집중을 하지 못했다. 친구가 졸업앨범 받으러 가자고 이야기하고 나서야 창민은 정신을 차리고 친구를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담임선생님께 졸업장과 졸업앨범을 받기 위해 교실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 윤호형?”

 

창민이 뒤를 돌아보았다가 윤호를 발견하고 앞 반이 먼저 일어나 나가고 있는 중에도 그 속을 재빨리 빠져나갔다.

 

! 어디 가!!”

 

친구가 소리쳤지만 창민은 듣지 못하고 연신 미안하다고 하며 인파를 빠져나가 자신이 보았던 자리에 서있는 윤호에게로 달려갔다.

 

윤호형!”

 

창민은 혹시나 자신이 잘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눈을 한 번 꽉 감았다 떴다. 앞에 서있는 건 윤호가 맞았다. 창민은 윤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윤호형.”

 

윤호는 창민이 너무나 기뻐하며 자신을 끌어안는 모습에 그냥 폰만 전해주러 왔을 뿐이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어떻게 왔어요?”

반차 냈어. 너 졸업하는 거 보고 곧바로 들어가야 돼. , 그리고 이거. 어제 두고 갔더라.”

형 집에 있었구나. 잃어버린 줄 알았어요. 다행이다. ! , 와줘서 고마워요. 저 교실 가서 졸업앨범만 받고 나오면 되니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야 돼요? 꼭이요!”

 

창민은 신신당부를 하며 대강당을 빠져나가는 친구들을 따라갔다. 교실로 향하던 친구들은 아까까지만 해도 세상에 모든 힘든 일 다 짊어진 것처럼 울상을 짓던 창민이 즐거운 듯이 웃자 의아해했다. 그리고는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심창민 쟤 갑자기 왜 저렇게 기분이 좋대?”

낸들 아냐? 졸업해서 좋은 가보지.”

 

졸업앨범과 졸업장을 받을 때까지 창민은 연신 싱글벙글 했다. 빨리 나가고 싶다. 창민은 그 생각밖에 안 들었다. 졸업앨범과 졸업장을 받고 담임선생님,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다 같이 사진도 찍은 창민이 교실을 빠져나가려하자 친구들이 붙잡았다.

 

어딜 가. 우리끼리도 찍어야지.”

나 가족들이랑 사진 찍어야 돼.”

누군 가족들 안 기다려? 강당에서는 울상이더니 갑자기 업 돼서는 왜 이래?”

, 알았어. 찍으면 되잖아, 찍으면. 빨리 찍어.”

 

창민은 사진을 찍으며 억지로 웃었다. 어색하게 웃는 모습이 그대로 친구의 폰에 담겼다.

 

사진은 톡으로 보낼게.”

나 이제 가 봐도 돼지?”

그래 가라 가!”

 

창민은 졸업앨범과 졸업장을 들고 재빨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숨을 잠시 고른 창민이 전화를 걸었다.

 

! 어디에요?”

[여기 정문이야. 바로 가봐야 돼서.]

조금만 기다려줘요. 지금 갈게요.”

 

졸업앨범과 졸업장을 꼭 끌어안은 창민이 정문으로 달려갔다. 윤호는 정문 담벼락에 기대어 서서 꽃다발을 들고 창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 . 아이고, 힘들다. , 많이 기다렸죠? 친구들이 단체사진도 찍어야 된다고 그래서. 찍느라고 늦었어요.”

괜찮아. , 이거. 아까 급하게 오느라 준비를 못했어.”

 

창민은 윤호가 건네주는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손에 든 것이 많아 버거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졸업 축하한다.”

진짜로 정말 고마워요.”

졸업 선물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만 해.”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그냥 형만. 형만 있으면 돼요. , 그리고.”

그리고?”

 

창민은 잠시 뜸을 들였다. 윤호는 창민의 대답을 기다렸다. 머뭇거리던 창민이 입을 열었다.

 

우리 여행가요. 이번 주 주말에는 가족들이랑 지내야 해서 좀 그렇고. 다음 주 주말에.”

생각해놓은 데는 있고?”

아니요. 이제 생각해보려고요.”

 

창민의 바지 주머니에 있던 폰이 울렸다. 손이 모자라 머뭇거리고 있자 윤호가 짐을 들어주었다.

 

받아봐.”

여보세요. , 엄마. , 저 이제 화장실 갔다가 나가려고요. , 빨리 갈게요.”

 

창민은 전화를 끊고 윤호에게서 짐을 받아들었다.

 

형이랑 더 있고 싶은데. 엄마가 빨리 오라고 해서. 저 들어 가볼게요.”

, 얼른 들어 가봐.”

.”

?”

 

창민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윤호의 입술에 뽀뽀를 하고 떨어졌다.

 

으어.”

 

윤호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당황하는 사이, 창민은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정문 앞에 선 윤호는 졸업한 학생들로 북적이는 운동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창민의 입술이 머물렀다 간 입술을 매만지는 윤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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